기타루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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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루 마사아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롯데 오리온스에서 활약했다. 조시 상업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1969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 평균 자책점, 1970년 MVP, 1971년 다승왕을 차지했다. 1974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은퇴 후에는 롯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에서 코치 및 프런트, JFE 동일본 경식 야구부 수석 코치, 모교인 조시 상업고등학교 수석 코치, 조시시 행정 어드바이저 등을 역임하며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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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루 마사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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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기타루 마사아키 |
원어 이름 | 木樽 正明 |
로마자 표기 | Kitaru Masaaki |
출생일 | 1947년 6월 13일 |
출생지 | 지바현 조시시 |
사망일 | 해당 없음 |
신장 | 182cm |
체중 | 82kg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지바현립 조시 상업 고등학교 |
프로 입단 연도 | 1965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2위 |
소속 구단 | 도쿄 오리온스 (1966년 ~ 1972년) 롯데 오리온스 (1973년 ~ 1976년) |
첫 출장 | 1966년 6월 26일 |
마지막 경기 | 1976년 8월 14일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 롯데 오리온스 (1983년 ~ 1990년) |
코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7년) JFE 동일본 |
2. 프로 입단 전
기타루 마사아키는 지바현 조시시에서 태어나 1965년 조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롯데 오리온스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2. 1. 고등학교 시절
조시 상업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 1루수로서 출전했다. 팀은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이마바리니시 고등학교에게 패했다.[6] 이듬해 1964년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지만 같은 해 하계 소속 현 대회(지바 대회) 예선 3차전에서 도가네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이듬해 1965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팀의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서 출전, 팀은 순조롭게 승리하면서 준결승에 진출해 마키 겐지로 투수가 소속된 다카나베 고등학교에게 2대 1로 역전승을 거뒀다. 결승전에서는 미이케 공업고등학교와 맞붙었지만 투수 우에다 다쿠조에게 0대 2로 완봉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6] 같은 해 기후현에서 열린 국민 체육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기후 단기 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후치가미 스미오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승리,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팀 동료인 3번 타자 아텐보 도시아키(난카이 호크스로부터 드래프트 2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릿쿄 대학에 진학)가 있다.
2. 2. 프로 지명 및 입단 과정
조시 상업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63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 1루수로 출전하여 팀은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이마바리니시 고등학교에게 패했다.[6] 이듬해인 1964년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지만 같은 해 하계 소속 현 대회(지바 대회) 예선 3차전에서 도가네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이듬해인 1965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는 팀의 에이스이자 4번 타자로 출전, 팀은 순조롭게 승리하면서 준결승에 진출해 마키 겐지로 투수가 소속된 다카나베 고등학교에게 2대 1로 역전승을 거뒀다. 결승전에서는 미이케 공업고등학교와 맞붙었지만 투수 우에다 다쿠조에게 0대 2로 완봉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6] 같은 해 기후현에서 열린 국민 체육 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기후 단기 대학 부속 고등학교의 후치가미 스미오와 투수전을 펼친 끝에 승리,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팀 동료인 3번 타자 아텐보 토시아키(난카이 호크스로부터 드래프트 2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릿쿄 대학에 진학)가 있다.
졸업 후 와세다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도쿄 오리온스가 기타루를 2순위로 지명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프로 입단에 난색을 표했지만 당시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조의 설득으로 이듬해인 1966년 1월에 정식으로 입단했다.[7]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木樽 正明|기타루 마사아키일본어는 지바현 조시시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투수)이다. 조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롯데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1976년 은퇴할 때까지 프로 통산 112승을 기록했다. 1968년에는 부상으로 야수 전향을 고려했으나, 고야마 마사아키의 설득으로 투수로 남았다.
197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4경기에 등판했지만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1974년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경기에 등판, 2차전 선발로 나와 5이닝 3실점으로 강판되었으나 5차전에서 스즈키 타카마사를 상대로 2안타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지병인 요통으로 고생했다.[2]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3. 1. 롯데 오리온스 시절 (1966년 ~ 1976년)
스기시타 시게루, 호리모토 리쓰오가 착용했던 등번호 20번을 물려받아 빠른 공과 날카로운 슈트를 주무기로 프로 1년 차인 1966년부터 주력 투수로서 활약했다.[8] 1968년에는 부진으로 0승 1패로 끝나 한때는 야수 전향도 검토됐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고야마 마사아키는 “저 녀석(기타루)만큼 투수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녀석은 없다. 한번 더 다시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당시 구단 수뇌진에게 호소한 끝에 투수로서의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8]1969년에는 구원 투수로서 15승(1선발)과 1.72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는 등 퍼시픽 리그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8] 1970년에는 선발로 전향해 시즌 21승(20선발)을 올리면서 팀의 리그 우승 달성에 큰 기여를 했고 MVP와 베스트 나인을 동시에 석권했다.[8] 이듬해 1971년에는 24승(22선발승)을 기록하면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고[8] 3년 뒤인 1974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기여하면서 나리타 후미오, 가네다 도메히로, 무라타 조지와 함께 팀의 중심 투수로서 활약했다.[8]
197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 경기에서 우에다 다케시의 타구가 얼굴에 맞으면서 안면골절 부상을 입었다.[8] 당시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의 배려로 가네다 감독의 자택에서 완치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 특별한 식사 등이 준비됐다고 했지만 3일 후부터는 런닝했다고 한다.[8] ‘가네다식’ 치료의 보람이 있어서인지 불과 1개월 만에 팀에 복귀했고 그 해에 13승(10선발승)(6패)을 올리는 활약을 보였다.[8] 그러나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인해 극심한 슬럼프를 겪는 등[8] 1976년에는 29세 나이에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8]
연도 | 소속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66년 | 도쿄 롯데 | 17 | 13 | 3 | 0 | 1 | 3 | 8 | -- | -- | .273 | 319 | 78.0 | 75 | 4 | 11 | 0 | 0 | 32 | 0 | 0 | 35 | 26 | 3.00 | 1.10 |
1967년 | 44 | 12 | 1 | 0 | 1 | 8 | 8 | -- | -- | .500 | 589 | 146.0 | 129 | 11 | 26 | 5 | 5 | 90 | 0 | 0 | 45 | 41 | 2.53 | 1.06 | |
1968년 | 5 | 0 | 0 | 0 | 0 | 0 | 1 | -- | -- | .000 | 59 | 14.1 | 11 | 3 | 7 | 0 | 1 | 11 | 0 | 0 | 9 | 9 | 5.79 | 1.26 | |
1969년 | 51 | 6 | 2 | 0 | 0 | 15 | 9 | -- | -- | .625 | 651 | 162.0 | 135 | 12 | 31 | 7 | 9 | 70 | 2 | 0 | 45 | 31 | 1.72 | 1.02 | |
1970년 | 42 | 35 | 20 | 4 | 4 | 21 | 10 | -- | -- | .677 | 1091 | 278.0 | 225 | 29 | 42 | 2 | 7 | 161 | 0 | 1 | 92 | 78 | 2.53 | 0.96 | |
1971년 | 47 | 33 | 19 | 4 | 4 | 24 | 8 | -- | -- | .750 | 1082 | 266.0 | 245 | 32 | 45 | 8 | 13 | 168 | 0 | 1 | 107 | 102 | 3.45 | 1.09 | |
1972년 | 37 | 11 | 2 | 0 | 1 | 9 | 7 | -- | -- | .563 | 504 | 123.0 | 117 | 19 | 28 | 2 | 5 | 78 | 1 | 0 | 56 | 53 | 3.88 | 1.18 | |
1973년 | 44 | 15 | 4 | 2 | 0 | 14 | 7 | -- | -- | .667 | 656 | 165.1 | 141 | 9 | 37 | 6 | 7 | 88 | 2 | 3 | 55 | 52 | 2.84 | 1.08 | |
1974년 | 36 | 26 | 11 | 1 | 1 | 13 | 6 | 2 | -- | .684 | 820 | 201.0 | 182 | 17 | 52 | 5 | 9 | 85 | 3 | 1 | 79 | 69 | 3.09 | 1.16 | |
1975년 | 30 | 18 | 6 | 0 | 0 | 5 | 14 | 1 | -- | .263 | 596 | 140.2 | 147 | 14 | 42 | 3 | 7 | 44 | 2 | 0 | 71 | 62 | 3.96 | 1.34 | |
1976년 | 14 | 4 | 0 | 0 | 0 | 0 | 2 | 0 | -- | .000 | 163 | 35.2 | 45 | 2 | 12 | 0 | 1 | 14 | 1 | 0 | 24 | 22 | 5.50 | 1.60 | |
통산: 11년 | 367 | 173 | 68 | 11 | 12 | 112 | 80 | 3 | -- | .583 | 6530 | 1610.0 | 1452 | 152 | 333 | 38 | 64 | 841 | 11 | 6 | 618 | 545 | 3.05 | 1.11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도쿄(도쿄 오리온스)는 1969년에 롯데(롯데 오리온스)로 구단명을 변경
3. 2. 주요 기록
木樽 正明|기타루 마사아키일본어는 1969년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71년 다승왕을 차지했으며, 1970년 MVP와 베스트 나인을 동시에 석권했다.[2]통산 112승을 거두었으며,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4. 지도자 경력
기타루 마사아키는 은퇴 후 롯데에서 코치와 프런트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롯데 2군 투수 코치, 1군 투수 코치, 2군 감독을 역임했고, 이후 구단 스카우트 부장 등을 역임했다.[2] 2002년부터 2008년까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편성부와 2군 육성 담당 코치로 근무했다.
2011년에는 JFE 동일본 경식 야구부 수석 코치를 맡아 2013년까지 활동했고,[2] 2014년부터는 조시 상업고등학교 수석 코치와 조시시 행정 어드바이저를 겸임하며 지역 사회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조시시 행정 어드바이저로서 스포츠 진흥, 관광 진흥, 국제 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 활성화에 공헌했다.[5]
4. 1. 롯데 오리온스 코치 및 프런트
기타루 마사아키일본어는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롯데 2군 투수 코치, 1987년부터 1988년까지 1군 투수 코치, 1989년부터 1990년까지 2군 감독을 역임했고, 이후 구단 스카우트 부장 등을 맡았다.[2]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편성부에서 근무했으며, 2007년에는 2군 육성 담당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으나 2008년에 다시 편성부 소속으로 돌아갔다.4. 2. 요미우리 자이언츠 및 JFE 동일본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편성부에서 근무했고 2007년에는 2군 육성 담당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2008년부터는 다시 편성부 소속으로 돌아왔다.[2]2011년 8월부터 JFE 동일본 경식 야구부 수석 코치를 맡아 2013년까지 활동했다.[2]
4. 3. 조시 상업고등학교 및 조시시 행정 어드바이저
2014년 5월부터 모교인 조시 상업고등학교의 수석 코치로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고향 조시시의 ‘행정 어드바이저’로 채용되어 모교와 병행하여 초등·중등학생 팀과 리틀 시니어를 지도했다.[2]조시시는 스포츠 활동, 특히 조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야구의 부활을 통해 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기타루 마사아키를 행정 어드바이저로 임명했다. 재임 중에는 야구를 중심으로 한 스포츠 활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대만 여자 소프트볼 대표팀의 사전 캠프 유치와 조시 스포츠 타운 구상의 사업화 실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스포츠 진흥의 범위를 넘어 관광 진흥 및 국제 교류 등 모든 면에서 시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지방 공무원법의 개정에 따라 해당 직책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2020년 3월 31일에 퇴임했다.[5]
5. 연도별 투수 성적
도
속
판
발
투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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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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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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